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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인천 답동 성당 / 아이와 함께 갔다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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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벨카입니다. 주말에 아이와 어디를 갈지 고민하던 중 수리남에 나온 성당이 인천에 있다고 해서 방문했는데 잘못 찾아갔지만 아이와 함께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와서 이렇게 후기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인천 답동 성당

인천 답동성당은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본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습니다.

저는 어릴 적 천주교를 다니면서 세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성당에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주말을 이용하여 딸과 함께 방문하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저보다 딸이 더 좋아했습니다. 

1937년에 중축한 인천 천주교 성당은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입니다. 

 

답동 성당의 역사!!

먼저 답동성당의 역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전 건축이 가능해지자 블랑 주교는 국제도시로 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1842∼1896년)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됩니다..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년 7월 1입니다. 빌렘 신부는 일주일 후 임시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84명(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189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신바오로 1890~1893)가 2대 신부로 부임해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갔습니다.

 

마라발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갑니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제 4대 드뇌(전 으제니오1904∼1937년) 신부는 증축계획을 세우고 1935년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하여 2년 후인 1937년 원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성대한 축성식을 가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답동 성당 아이와 함께 갔다 온 후기

일요일 오후 시간대에 가니깐 미사는 안 하고 있었고 주차장에 자리도 많아서 자유롭게 답동 성당을 딸과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답동 성당의 건축물은 사실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르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어서 신기해하는 딸이었습니다. 

답동 성당의 내부는 성스러운 내부에 햇빛이 더해져 마음이 경건해지는 곳입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법을 딸에게 알려주었고 딸은 알려준 대로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딸에게 무슨 기도를 했냐고 물어보니깐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답동 성당 답사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왔습니다!


이상으로 인천 답동 성당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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